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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루이비통. 루이비통 창시자, 루이비통 역사, 샹젤리제 거리, 노에, 파빌론 백, 에삐, 베르나도 아르도, 마크제이콥스, 베르니, 무라카미 다카시, 모노그램램 멀티 컬러

패션&미용/역사&이야기

by Cherry Stone 2014. 11. 15.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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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비통. LVMH로 넘어가기 전/후
아버지가 목수였던 어린 루이 비통은 원래 목수가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던 루이는 1835년 15세 때 고향을 떠나 파리로 향합니다.
당시 자동차, 기차도 없던 시기. 파리로 가는 길에 식당이나 마구간에서 여비를 벌어 1년만에 파리에 도착했습니다.
가방점 구인광고를 보고 무작정 들어간 루이. 파리에서는 가방점에서 가방 판매 외에도 부유층 짐을 대신 싸주는 일을했는데. 그곳에서 루이는 짐 싸는 일 부터 시작합니다. 가방을 잘 싸 그의 실력은 파리에 유명세가 됬고, 나폴레옹 3세 황실까지 소문이 났습니다.


(왼)루이 비통 (중앙,오른쪽)나폴레옹 3세(1808~1873) 부인 유지니 황후
출처:(왼)위키피디아 (중앙,오른쪽)friend25kr.blogspot

나폴레옹 3세 부인 유지니 황후는 옷을 많이 가지고 다니기로 유명합니다. 다른 나라로 여행 갈땐 300여벌 정도 옷만 가지고 다녔는데, 당시 귀부인이 입었던 옷 한벌이 약 6kg정도라 옷만 약 1.8톤만 가져 다닌겁니다. 옷들을 구겨 지지 않게 도와 준 사람이 루이 비통.
30이 넘도록 루이는 황후의 짐 싸며, 실력을 인정 받으며 황실에 일하던 어느날! 33세. 패커의 일로 가방에 대해 전문가가 된 그는 황후의 후원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여행 가방점을 엽니다.

어린 나이에 홀로 고향을 떠나는 것도 큰 모험이었을 텐데, 그는 어떤 심정으로 떠났는지 새삼 궁금합니다.
당시 잡일에 불과한 짐싸는 일. 사소한 일이라도 열심히, 자신만의 노하우를 가진다면 사람들이 알아봐주고, 지원해주는 누군가가 나타난다. 그 뒤에도 꾸준히 자신의 장점을 키워 열심히 한다면 명품이 된다.
루이 비통이 주는 교훈이 아닐까요? 명품은 정말 아무나 명품이 되는게 아니구나 하는걸 다시 느끼는 계기가 됬습니다.


(왼)당시 여행가방 트렁크 (중앙,오)루이 비통이 만든 트렁크
출처:(왼,중앙)google image (오)parisart.tistory

교통 수단이 발달하면서 부유층이 늘게 되었고, 귀부인들은 여행때 마다 값비싼 옷을 담아 다녔는데, 당시 사진에서 보는것 처럼 위가 둥근 보물상자 처럼 생긴 트렁크는 운반하기 불편한 디자인이었습니다.
1854년 루이 비통은 그레이 트리아논 캔버스로 제작된 사각 형태의 트렁크를 만들었습니다.
세계 최초의 사각 트렁크!. 쌓을 수도 있고 방수 캔버스로 방수도 잘되고, 내부에 칸막이가 있어 효율적으로 정리 할 수 있었습니다.
트렁크로 그는 짐싸는 패커 뿐만아니라 제작자로도 유명세가 되었고, 가게를 오픈한지 5년 만에 공장을 설립했고, 수백명의 직원을 거느렸습니다.
1859년. 아들 조르주 비통에게 사업을 물려주는데, 그는 루이 만큼 아이디어와 솜씨가 뛰어났고, 1867년 파리 세계 박람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왼)루이비통2세. 조르주 비통 (오)루이비통3세. 가스통 비통
출처:pandalouis.tistory

파리 세계 박람회 하면 누가 또 떠오르지 않으세요? 얼마전 포스팅한 에르메스. 1867년 티에리 에르메스가 1등. 그의 아들 샤를 에밀 에르메스가 1878년에 수상.
그러면 루이 비통 아들 조르주 비통과 티에리 에르메스는 같은 박람회에 함께 참가해 우수한 성적을 거둔거로군요!!
에르메스 관련 포스팅은 아래 에르메스 상표를 클릭해주세요 ^^



▲위 그림을 클릭하시면 '에르메스'에 대한 정보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인기가 높은만큼 당시에도 루이 비통은 모조품 많아 조르주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1872년 첫 모조품 방지를 위해 줄무늬 트렁크가 탄생했습니다.
조르주 비통은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실용적인 여행가방을 만들었고, 프랑스를 넘어 영국, 미국에도 고객이 생겨, 1885년 런던과 뉴욕에 매장을 오픈하면서 전 세계로 사업을 확대 해 나갔습니다.


(왼)디미에 (오)모노그램
출처:google image

하지만 다시 모조품이.. 또 다시. 모조품을 방지 하려고 두번째 모조품 방지. 1988년 ‘다미에’ 패턴을 선보입니다. ‘다미에’는 현재의 루이 비통의 시그니처 패턴!
그 당시 19세기 귀족 사회 영향으로 명품브랜드가 되어 모조품이 많이 생겼던 것입니다.
‘다미에’패턴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모조품으로 고생하여 이번엔 아버지의 머릿글자 L과 V를 따서 마지막 세번째 모조품 방지.1896년 오늘날 루이 비통의 상징 모노그램이 탄생한 것입니다.
조르주는 더 이상의 모조품을 방지하고자 상표등록까지 했고, 그 뒤의 모조품은 모두 고소 합니다.


출처:(왼)google image (오)news.zum

그 후 조르주는 모노그램을 활용해 주전자와 찻잔을 넣을 수 있는 티 세트 트렁크, 타자기를 보관 운반 할 수 있는 트렁크를 만들었으며, 여행자들을 위해 가방 주인 이니셜을 새겨주었습니다. 획기적인 디자인과 실용적 여행가방으로만으로 명품은 될 수 없겠죠? 여행가방에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내구성!. 그는 가방 실험을 위해 직접 가방을 들고 실험에 나섰습니다. 루이 비통 가방은 현재까지도 그 장인 정신과 내구성으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샹젤리제 거리
출처:(왼)google image(오)럭셔리

파리의 서쪽 지역은 점차 발전했고, 1914년 루이 비통은 현재 본점인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로 이동 했습니다.
루이 비통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귀족들은 더 많이 찾게 되었고, 1940년 2차 세계대전에서도 사그라 들지 않았습니다.
그 유명한 샤넬도 이 시기에는 문을 닫게 되는데 말이죠. 독일이 파리에 쳐 들어왔지만 독일은 이미 루이 비통에 매료 되있었기에 살아 남을 수 있었습니다. 전쟁 후, 시대는 더이상 딱딱한 트렁크가 필요 없어졌습니다. 당시 자동차가 탄생하던 시기였기 때문 입니다.


(왼)노에 (오)파빌론
출처:google image

시대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소프트 백을 만들지만, 민무늬는 인기가 없었고, 모노그램천은 너무 두꺼워 난간에 부딪힙니다.
조르주의 아들은 부드러운 모노그램 캔버스를 만들어 1932년 가스통은 첫 번째 소프트백 ‘노에’를 탄생 시킵니다.
‘노에’는 면에 비해 부드럽지 못했고, 1959년엔 면과 같은 소재로 모노그램을 완성. 1966년엔 ‘파빌론 백’ 탄생.


(왼)'에피' 라인 (오)베르나르 아르도
출처:(왼)google image (오)위키피디아

소프트 백은 트렁크에 비해 저렴하고 편해 그 인기는 아시아 까지 넘어 왔습니다.
일본에 들어온 루이 비통은 너무 비싸 일본 사람들이 프랑스 까지 가게 된 사태. 1978년 루이 비통은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 매장을 오픈 했고, 1985년엔 ‘에피’라인을 런칭하면서 성공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위기는 찾아오는 법이죠? 1980년 사람들의 취향이 더욱 다양해 지면서 뤼이비통은 촌스러운 브랜드로 낙인되면서 가족경영이 힘들어 졌습니다.
이때 나타난 사람이 프랑스 국립 행정학교를 졸업한 ‘베르나르 아르도’ 그는 루이 비통만 아니라 명품 브랜드가 힘이 없을때 집어 삼키는 명품 사냥꾼. 하지만 다 망해가던 루이 비통은 그의 경영으로 예전가치에 비해 더 뛰어난 세계적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왼)마크 제이콥스 (오)마크 제이콥스와 그래피티
출처:(왼)구글 (오)s20.co.kr

(왼)2013 s/s 마크 제이콥스 (오) '베르니'라인
출처:(왼)blogdegalleria.tistory (오)pursevalley.blogspot.

(왼)무라카미 다카시 (오)모노그램 멀티 컬러
출처:(왼)yamatinen다음블로그 (오)구글

1997년 루이 비통 새 아트디렉터 ‘마크 제이콥스’가 되면서 의류라인을 출범했고, ‘베르니’라인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래피티' 또한 마크제이콥스가 탄생시켜 인기를 얻었습니다. 일본인 아티스트 타카시 무라카미와 콜라보레이션으로 모노그램 멀티 컬러를 론칭했습니다.


(왼)루이 비통5세. 파트리크 루이 비통 (오)핫스탬핑
출처:(왼)news.zum (오)관세청블로그

루이 비통의 자손들은 어떻게 됬을까요? 경영은 이미 넘어갔지만 제조 기술자로 특별 주문 제작과 홍보를 맡고 있다고 합니다. 젖병 케이스, 케이크 상자 같은것이 이에 속하는 것이죠.
백년 전과 같이 이니셜 새기는 서비스는 여전하고, 왕족들이 주문 제작 하듯 고객 맞춤 제작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여행가방과 가죽 소품에 무료로 시그니처 새겨 주는 ‘핫 스탬핑’, 맞춤 가방’스페셜 오더’, 모노그램 패턴에 원하는 색상과 이니셜 넣는 ‘몽 모노그램’
한 예로 김연아 스케이트 가방이 있죠? 포스팅 참조 하세요^^ 아래 김연아선수의 스페셜 오더 스케이트 트렁크 클릭!



▲위 그림을 클릭하시면 '스페셜 오더'에 대한 정보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2013년에는 각 도시를 대표하는 색상으로 S/S광고 촬영했습니다.
뉴욕은 도시 상징 옐로우캡(택시)으로 노랑색.
파리는 시의 상징색인 자유의 파랑색. 블루.
상하이는 중국의 부와 행운을 상징하는 빨강색. 레드를 선택합니다.


출처:glamourboysinc.com
참조: 패션의 탄생.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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