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다는 미우치아 프라다 부터 시작된게 아닌걸 아시나요?
버버리, 에르메스 등 나올때 프라다도 오픈 했다고 하네요. 왕가의 로고 까지 받았던 프라다는 잠시 정체기가 있는데요.
지금의 프라다가 있기까지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프라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출처:m.blog.daum.net:qwertcc:158

1913년 마리오 프라다(미우치아 프라다의 할아버지)가 밀라노에 있는 '프라텔리 프라다'라는 매장을 내면서 시작 되었습니다.
1919년에는 이탈리아 왕실에 가방을 납품하는 공식 브랜드로 지정되어 왕가의 로고 까지 받았습니다.
하지만 1,2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겪으면서 프라다는 내리막을 달리며 그의 아들들은 사업을 물려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마리오 프라다는 딸이 물려받고 지금의 프라다는 1971년 그녀의 손녀인 미우치아 프라다가 물려받게 됩니다.


포코노 백
출처:romabike.eurobike.kr

미우치아 프라다는 1949년 생으로 밀라노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급진적인 페미니스트 였습니다.
하지만 가업의 위기로 그녀는 액세서리 디자인을 시작으로 비즈니스에 뛰어듭니다.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아이디어는 참신했습니다.지금의 나일론 소재로 만든 백이 유명해졌을리라 누가 상상했습니까?
나일론으로 만든 프라다 '포코노백'은 가볍고 견고해 커이어우먼 사이에서 유행했습니다.


프라다 부부(왼)파트리치오 베르텔리(오)마우치아 프라다
출처:cluster1.cafe.daum.net

그녀가 지금의 현재 CEO인 파트리치오 베르텔리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명품 프라다는 없었을것입니다.
이 둘의 만남은 어땠을까요?
프라다는 국제가죽박람회에서 파트리치오 베르텔리가 프라다 모조품을 만들어 팔다가 만났다고 합니다.
미우치아는 그에게 화를 냈지만 그는 사업확장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나쁜 첫 인상이었지만 같이 사업을 하게 되었고 부부의 연까지 맺게 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 한 부분
출처:richwang.tistory.com

출처:nusmag.com
나일론 가방 후 튀지않는 색상, 디자인, 실루엣 심플함을 유지한 여성복 라인을 만들어 인기를 얻은 후 2번째 브랜드 미우미우를 만들어 냅니다.
미우미우는 1996년 디카프리오가 나온 '로미오와 줄리엣'에 의상을 담당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미우미우는 1992년 프라다보다 낮은 가격으로 젊은 여성 타겟으로 한 브랜드 입니다.
같은해에 프라다의 나일론 백팩의 부활. 1997년에는 프라다 스포츠라인. 정장에 운동화를 신어 지금 현재 정장에 운동화 컨셉이 지속 되는건 아닐까요?


출처:siegblog.com

명품 사냥꾼 베르나르 아르도에게 구찌를 비싼 값에 팔아 넘기고 그 덕에 LVMH와 PPR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프라다는 구찌 외에도 여러브랜드를 인수 매각하면서 엄청난 수익을 챙겨 LVMH와 PPR 그룹에 이어 세계 패션 업계에서 세번째 규모 명품 그룹으로 성장했습니다.



출처:zine.istyle24.com
우리나라에도 한때 프라다의 모조품이 많이 있었죠? 지금도 몇몇 가판대에서 판매하는걸 보기도 했는데요.
세계적인 경제불황과 나일론백의 인기하락.
모조품으로 프라다는 침체기를 맞습니다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영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 합니다.
2000년대가 되자 프라다는 패션 외에도 건축. 세계적 건축가 쿨하스와 함께 1999년 뉴욕 프라다 매장 에피센터를 시작으로 프라다는 패션에 건축을 접목시킨 트랜스포머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2009년 서울 경희궁에서 펄쳐진 트랜스포머 전시회는 원, 십자, 육각형,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전시회장 자체가 다양한 모양으로 바뀌는 신개념 건축이었습니다.


도쿄 에피센터
출처:www.design.co.kr

경희궁 트랜스포머 전시회
출처:www.design.co.kr

이렇듯 프라다는 다른 명품과 달리 건축물 사업도 확장 시키고 있습니다.
그녀의 반쪽 파트리치오 베를텔리의 만남이 지금의 명성을 유지하는 가장 큰 요소가 아닐까요?
전 이 부부를 보면 인연이라는게 정말 언제 어디서 올지 모른다는 말이 정말 맞는말 같습니다. 여러분의 반쪽은 찾으셨나요? 처음엔 악연으로 만나도 나중엔 부부가 된 이들처럼 여러분도 주위를 잘 살펴 보세요.
진주 같은 사람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깐요. ^^

참조: 패션탄생, 구글,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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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그대'에서 천송이가 입었던 옷이 부츠 제외 모든것이 랄프로렌 제품인걸 아셨나요? 랄프포렌 블루라벨 제품이라고 하네요. 천송이 옷을 찾던 중 알게된 랄프로렌.


출처:diamarine.tistory.com

고등학교 앨범에 ‘백만장자가 되고 싶다’던 그 소년은 억만장자가 되어있습니다. 무일푼으로 시작해 자신의 이름을 딴 '패션 왕국'으로 68억달러(약 7조원·2014년 포브스 추정)의 부를 쌓아 올린 랄프 로렌의 삶은 '아메리칸 드림’ 그 자체입니다.
그의 성공 비결은 “열심히 일하고, 또 열심히 일하고, 일하는 걸 즐기는 것.” 어린시절 백만장자가 꿈이었던 그는 돈을 위해서가 아닌 삶을 디자인하고 싶다는 명확한 꿈을 가지고 지금 이 자리에 설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회사가 랄프교라 일컫을 정도로 2만 5000여명의 직원들이 잘 따른다고 합니다.


출처:blog.daum.net/rnauqhk/6609757

"좋은 디자이너, 좋은 사업가가 되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위대한 디자이너, 위대한 사업가가 되는 건 굉장히 어렵다. 그 차이가 바로 '위대한 팀'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난 정말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열심히 한다는 것이 무조건 혼자 하라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다. 당신만의 '군대(army)'를 가져야 한다.” 수많은 디자이너를 조사했지만 랄프로렌이 가장 닮고 싶은 사람입니다. 가구, 페인트, 옷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그의 경영과 디자인(현재는 경영자가 바뀌었지만), 수 많은 직원들에게 존경을 받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그. 그리고 당신만의 군대를 가져야 한다라는 말이 정말 인상깊습니다. 그리고 다른 디자이너들의 명언에 비해 현실적인 느낌이 와 닿는다고 해야할까요?

"위대함을 원한다면 그 위대함 속에 시간을 담으면 됩니다. 위대함은 하루 아침에 완성되지 않으며, 마법처럼 손짓 하나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눈으로 인생을 바라봅니다. 제 눈이 저의 카메라죠. 저는 삶의 모든 경험을 작품에 반영합니다. 결국, 삶의 매 순간 순간이 곧 저의 개인 도서관을 이루는 셈이죠.”

"나는 패션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꿈이 아니었다. 나의 꿈을 실천하기 위해 디자이너가 된 것이다”

“스타일은 개성입니다. 패션이 아니죠. 패션은 한 순간이지만, 스타일은 영원합니다."

이중에서 전 "나는 패션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꿈이 아니었다. 나의 꿈을 실천하기 위해 디자이너가 된 것이다” 무엇이 되고 싶다기 보단 무언가를 위해 일을 우선 해보는 저의 상황가 비슷해서 그럴까요?
여러분은 어떤 글이 가장 와 닿으시나요? 이번 명언은 글로만 아닌 랄프로렌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사진속 그의 어록을 함께 감상해 보세요.^^



출처:랄프로렌 홈페이지

이미지와 함께 그의 이야기를 보니 한층 더 흥미가 느껴졌는데 여러분은 어떠셨나요?
랄프로렌의 어린시절. 백만장자가 꿈이던 그 소년이 억만장자까지 된 스토리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랄프로렌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시다면 아래 이미지를 클릭해주세요.^^



▲위 그림을 클릭하시면 '랄프로렌'에 대한 정보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참조: biz.chosun.com,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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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하면_______이다.
샤넬하면 가장 먼저 떠 오르는게 뭔가요? No.5? 트위드 슈트? 퀼팅 백? 진주목걸이? 샤넬이 명품이 되기 까지의 변천사를 알아보겠습니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가브리엘 샤넬은 어린시절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떨여저 고아원에서 동생과 생활합니다. 하나뿐인 가족 동생마저 병으로 사망합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18살에 보조 재봉사와 카바레에서 노래를 부르며 생계를 꾸려 나갑니다. 샤넬이 부르던 노래중 ‘코코리코’가 있는데 그 덕에 사람들은 ‘코코’라는 별명이 생기게 됩니다.


(왼)샤넬 (오른쪽)당시 유행하던 화려한 모자와 샤넬 모자
출처:(왼)blog.sktworld (오른쪽)it.co.kr

샤넬 인생은 많은 남성들의 도움과 사랑이 많이 차지 한다고 해도 가언이 아닙니다. 그 중 첫번째. 가브리엘의 인생 전화점을 주게 되는 한 신사. 에티엔 발장. 발장의 구애로 25살에 그의 정부가 되어 사교계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 당시 유행하던 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승마복을 리폼에서 입기도 합니다. 하지만 상류층 스타일이 패션 브렌드던 시절. 많은 창부와 정부들은 상류층을 따라 하며 그들과 같아 보이게 했었는데요. 샤넬의 의상은 당연 눈에 들어오지 않았겠죠? 샤넬은 발장과 어울리며 상류 문화에 대해 습득해 나가면서, 자신의 패션 감각을 살려 디자인도 했습니다. 그 중 제일 먼저 선 보인 것이 모자. 귀부인들에게 모자가 인기를 끌면서 1908년 샤넬은 자신만의 모자가게를 엽니다. 모자 가게 오픈한 샤넬을 위해 발장은 그녀에게 사업가로 성공한 지인 카펠을 소개해줍니다.


샤넬과 카펠
출처:(왼)artinsight(오른쪽)shezcom

친구를 함부러 여인에게 소개해주면 안된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 건 아닐까요? 샤넬과 카펠은 비슷한 인생관으로 서로에게 끌리게 되며, 결국 샤넬은 발장을 떠납니다.

1901년 두번째 남자 카펠의 후원으로 파리 캉봉 거리 21번지에 파리의 모자 디자이너 ‘샤넬 모드’를 열면서 인기를 얻습니다. 화려한 모자가 많았던 곳은 샤넬의 심플한 디자인은 엄청난 인기를 얻었습니다. 모자로 유명세가 된 샤넬은 의류 패션에도 손을 댑니다. 당시 코르셋과 불편하지만 화려한 옷이 유행이던 스타일이 샤넬에 의해 바뀌게 됩니다.


(왼,중앙)코르셋 (오른쪽)당시 유행하던 화려한 옷(화이트드레스)에서 샤넬이 디자인한 옷(흑백)
출처:(왼)채널 뉴스 (중앙)위키피디아 (오른쪽)it.co.kr

불편한 코르셋은 없어지고,긴 스커트도 무릎 길이까지. 샤넬은 시대 흐름도 파악하고 있던 걸까요? 여권 신장 운동으로 1910년 부터 1920년대의 트렌드를 샤넬이 장악합니다.
그녀를 후원하던 카펠은? 세계1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 진출을 위해 영국 귀족과 결혼하고 맙니다. 인생관과 서로의 사랑도 결국 명예를 이길 수 없는 것일까요? 하지만 카펠은 결혼 후에도 샤넬을 만났고, 결국엔 이혼 하고 다시 샤넬과 함께합니다만… 누군가를 불행하게 한자는 결국 끝까지 행복하지는 못한건가요? 1919년 카펠은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맙니다. 그 후 그녀는 일에 몰두 하며 1921년 쿠튀리에 인정을 받으며 샤넬 오트 쿠퀴르 하우스를 뤼 캉봉 21번지에 설립합니다.


(왼)마릴린 먼로 (오)샤넬 No.5
출처:(왼)neurotics.egloos(오른쪽)myjlook

고객이 많아지면서 VIP도 생기게 됩니다. VIP고객을 위해 만든 향수가. 그 유명한 NO.5 마린린 먼로의 잠옷 NO.5하면 가장 유명한 설이 있죠? 잠잘 때 무엇을 입냐는 질문에 마릴린 먼로는 “전 샤넬 넘버5라고 대답했죠. 누드라고 말하긴 좀 그렇잖아요?” 수 많은 숫자중에 왜 NO.5? 제조자가 10번까지 샘플을 만들었는데 그중 5번을 선택을 해서 No.5가 탄생. 그것 말고도 컬렉션이 5일에 열려 행운의 숫자로 여겨 NO.5라는 설도 있습니다. 정말 단순한 작명 실력이죠? ^^; 이 향수는 고객 선물용으로 제조 되었지만 고객들에게 인기가 많아져 1921년에 샤넬 NO.5가 출시 됩니다.


리틀 블랙 드레스
출처:Vingle image


(왼)당시 샤넬 진주목걸이 (오)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샤넬 목걸이
출처:(왼)pdtaeng.tistory (오)google image

장례식에만 입던 검정옷을 세련되게 샤넬만의 스타일로 만든 것이 1926년. ‘리틀 블랙 드레스’ LBD(Little Black Dress)라고도합니다. 처음에 꺼리던 블랙 드레스는 곧 유행 합니다. 블렉드레스를 처음 선 보였을때 ‘보그’에선 “become a sort of uniform for all women of taste” 다양한 취향을 가진 모든 여성을 위한 일종의 유니폼이 될것이다.

그 후에 샤넬의 전설적인 아이템. 샤넬 슈트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샤넬손에 거친 진주 모양 악세사리는 더이상 보석이 아닌 장식품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샤넬 상징 중 하나이던 진주목걸이는 모조품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전 이번 포스팅 자료 조사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나중에 소개할 백도 원래는 서민층으로 부터 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샤넬은 에르메스, 루이비통처럼 처음부터 상류층을 타겟으로 만든 것은 아닌것 같습니다.
에르메스와 루이비통 관련 정보는 아래로고를 클릭해주세요^^



▲위 그림을 클릭하시면 '루이비통'에 대한 정보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위 그림을 클릭하시면 '에르메스'에 대한 정보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모조품 진주 악세사리처럼 우리가 샤넬에 대해 착각하는 것이 많은데, 그 중 하나가 샤넬 상징 꽃 입니다. 얼핏 보기엔 장미 같고, 많은 분들이 장미로 알고 계시지만. 사실 그 꽃은 동백꽃. 카멜리아 입니다. 자랑, 겸손한 마음의 꽃말을 가진 이 꽃은 샤넬이 가장 좋아한 꽃이라고 합니다.


(왼)동백꽃 (오)샤넬 화장품
출처:(왼)eagonblog (오)dreamcity.tistory

그녀의 친구는 영국수상. 세계1차대전과 달리 2차 세계대전에서는 샤넬은 1939년 잠시 사업을 접습니다. 그녀의 사랑은 2차 세계대전에도 찾아옵니다. (물론 2차 세계대전 일어나기전에도 수많은 남자가 있었답니다.) 독일군 나치 장교. 한스 귄터 폰딩클라게. 그와 함께하여 샤넬은 전쟁중에도 위험 없이 지낼 수 있었지만, 전쟁 후엔 나치 애인이라는 명목으로 잡힙니다. 그녀의 인맥은 어디까지 인가요.. 위스턴 처칠이 친구였던 샤넬. 그가 도왔다는 소문도 있다는데… 얼마후 무죄로 석방됩니다. 무죄로 판명나자 샤넬은 더이상 프랑스에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구요? 프랑스인들은 샤넬을 매국노라 생각했기 때문에 샤넬의 명성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샤넬 트위드 수트
출처:korea.nomesdesign

샤넬이 없어진 후의 프랑스엔 외국인 디지아너 발렌시아가와 크리스찬 디올과 같은 신 디자이너들이 속출 했습니다. 15년간의 망명생활 후 1954년 71세로 파리에 돌아옵니다. 반겨주는이는 없었지만, 그녀는 컴백을 준비 합니다. 설상가상인가요? 쇼 이후에 사람들은 20년 전과 비슷하다며 냉대했고, 디올이 디자인한 라인있는 옷이 유행합니다. 그 후 샤넬은 절망하지만… 샤넬을 버린 곳은 오직 프랑스. 미국과 영국은 샤넬을 환영합니다. 그녀의 전성기가 다시 온 것이죠. 역시 노력하는 사람에겐 배반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반 세기 전에 유행하던 샤넬 슈트는 가슴과 힙이 작은 여성에게 아름답게 보이도록 해주었고, 지금 까지 사랑 받고 있습니다.


(왼)샤넬 퀼팅백 (오)샤넬 가방
출처:(왼)flyairfrance (오)dayzf.tistory

아직 소개 안한 샤넬 고유 명사가 있다구요? 1955년. 퀼팅백 중에서도 첫 백. 2.55 왜 2.55냐구요? 샤넬 NO.5처럼 단순한 이유. 1955년 2월에 런칭해서 2.55라고 합니다. 2.55백 탄생 배경은 항상 손에 쥐던 가방이 불편해서 끈을 연결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어린시절 열쇠 체인을 영감을삼아 만든 것이 이 유명한 퀄팅백입니다. 이런 사소한 곳에서도 영감을 받은 한 사람이 또 있죠? 바로 마크제이콥스의 ‘그레피티’백입니다.



▲위 그림을 클릭하시면 '그레피티'에 대한 정보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그 후 87세의 나이에도 컬렉션을 준비하다 1971년 사망하고 맙니다. 그녀의 조국 프랑스에는 배신자로 낚인찍혀 묻히지 못하고 스위스 로잔에 묻힙니다. 장례식엔 발렌시아가, 이브 생 로랑 등 패션 거장들이 몰려와 그녀의 죽음을 애도 했습니다. 비록 조국엔 묻히지 못하지만 패션계에서는 한 획을 그은 그녀 샤넬. 샤넬의 수많은 남자들의 후원과 그들로 얻은 영감이 아니였다면 지금 명품 샤넬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의문을 가져봅니다. 지금은 가방, 의류, 향수 뿐만 아니라 화장품,악세사리,신발 등 다방면에서 샤넬을 이름을 내건 수많은 상품들이 출시 되고 있습니다.


샤넬 무덤
출처:(왼)위키트리



출처:(위)eyewear.tistory (왼)tiktok798.tistory (오)mad.kr

참조: 패션의 탄생. 구글.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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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에리 에르메스 시작으로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가 된 에르메스
샤넬, 디올, 버버리 등 명품에 비해 에르메스는 역사와 전통이 매우 깊습니다. 가족경영으로 이어가는 유일한 명품이 아닐까 생각 됩니다.


티에리 에르메스
출처: hulax 다음 블로그

1801년 티에리 에르메스. 에르메스 창시자가 태어납니다. 그는 파리에서 꼼꼼하게 만든 마구용품으로 인기를 얻습니다. 티에리만의 장인정신으로 마구상들 중 독보적인 가게로 파리 세계 박람회에서 티에리 에르메스는 장인정신을 인정받아 1등을 차지 합니다. 1878년 박람회에선 티에리 아들 샤를 에밀 에르메스가 파리 세계박람회에서 수상을 하게 됩니다. 그 후 티에리 에르메스는 1878년 세상을 떠났고 샤를 에밀 에르메스가 그 뒤를 이어 갑니다. 그는 아버지 뒤를 이어 세계 왕실과 귀족들에게 마구 용품을 납품할 정도로 솜씨를 인정받습니다. 1902년 그는 은퇴하고 두 아들에게 가업을 물려줍니다.


(왼)에밀 모리스 (오)블리드백(=부가티)
출처: (왼)cukfollow 티스토리 (오)fpasshion.blogspot

둘째 아들인 에밀 모리스!! 이분 이래로 에르메스는 제1의 전성기를 맞이 합니다. 1918년 1차 세계 대전 당시 기마병에 안장을 공급했었는데 그는 사업차 미국과 캐나다를 방문하면서 캐딜락을 보게 됩니다. 캐딜락 후드에 달린 지퍼를 보고 자동차 외의 독점권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에르메스는 프랑스에 지퍼를 최초로 들어오게 했고, 세계 최초 지퍼백을 만드는데 그 이름은 “볼리드”입니다. 자동차 브랜드인 부가티와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자동차 여행용 백이 탄생합니다. 그래서 볼리드 대신 부가티라고도 불렀다고 합니다. 볼리드 백의 특징 중 하나는 정면 타원형 안에 여행용 가방 목적에 맞게 고객 이름을 새김니다.



(왼)필레 드 셀 (오)에르모토
출처: luiner 티스토리

1920년 미국 여행 중이던 모리스는 자동차 회사 포드를 방문하면서, ‘이젠 마차가 사라질꺼야. 자동차, 배, 기차의 시대가 오겠지’ 시대 변화를 감지한 에르메스는 마구 용품에서 여행과 생활용품으로 중요 품목을 바꿔 가방, 벨트, 장갑에 이어 의복과 손목시게, 자동차 소품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를 넓혀 갔습니다. 에르메스는 공장의 대량생산 체제에 굴복하지 않고 전통적인 수작업과 소량 생산 주의를 고집합니다. 그 중 가죽 제품 작업시 안장을 꿰맬 때 쓰던 독특한 박음질 새들 스티칭을 그대로 사용하여 에르메스의 가치를 높였습니다. 제품의 희소성으로 대중들에게 동경을 받기 시작합니다. 전통을 지켜나가고 싶던 에밀 모리스는 1927년 ‘필레 드 셀’ 이라는 팔찌를 선보입니다. 이 팔찌는 가죽 스트랩에 말 재갈 모양의 실버 장식을 단 에르메스 정통 오리지널 팔찌. 시계의 탄생은? 딸 재크린에게 시계를 만들어 선물한 에밀 모리스가 시계를 만들어 딸 재크린에게 선물했는데, 이 시계가 큰 호응을 얻으며 이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1928녀 슬라이드 바방식의 가죽 덮개를 만든 첫 시계 '에르모토’가 탄생 합니다. 당시 골퍼들에겐 손목시계는 불편했고, 에르메스는 벨트 시계를 선보인 것입니다.


(왼)카레 (오)샹 당크르 디자인 팔찌
출처: luiner 티스토리

스카프 라인은 어떻게? 우연히 만난 군인의 손수건을 본 것이 시초로 실크 장인들이 많던 프랑스 리옹에 스카프 공장을 건립하고 스카프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1937년 에르메스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국제 박람회에서 에르메스의 첫 실크 스카프 '카레' 를 론칭하여 큰 주목을 받습니다. 카레는 불어로 정사각형을 뜻합니다.


스카프의 이름은 ‘주 데 옴니버스 에 데 담 블랑시’ 모두를 위한 게임과 햐얀 옷의 숙녀 라는 뜻. 가로 세로 90cm. 정사각형. 에밀 모리스는 아들이 없었고, 사위가 있었는데. 그는 건축가가 꿈이었지만 에르메스를 위해 일합니다. 취미가 수석 수집이었던 그는 자주 바닷가를 산책 했는데, 우연히 닻과 쇠사슬을 발견하고 팔찌를 만들었습니다. 팔찌외에도 ‘샹 당크르’ 디자인은 에르메스 제품 전체에 퍼져나갔고 클래식한 아이콘으로 자리잡습니다.


출처: 오피스 티스토리

1939년 2차 세계대전 당시 에르메스 제품은 부드러운 크림색 종이 상자였습니다. 하지만 전 쟁 후 상자를 구하기 어려웟는데 당시 이름도 없는 오렌지 상자뿐. 오렌지 색은 금기된 색, 저주받은 색, 천한 색으로 취급됬지만 에밀 모리스는 이를 다르게 생각 했고, 오렌지색 상자는 에르메스를 상징하는 시그니처 아이템이 됩니다.


출처: fpasshion.blogspot


(왼)모나코부부. 오른쪽 모나코 왕비. 켈리백이 유명해진 사진 (오)켈리백(=프티 삭 오트)
출처: luiner 티스토리

1951년 수 많은 명품을 만들어 내고 티에리 에르메스는 사위에게 에르메스를 물려주고 생을 마감합니다. 로베르는 우선 로고를 만듭니다. 마차시작된 에르메스. 말과 마차, 기수가 표현된 로고가 탄생하게 됩니다. 로베르는 수많은 실크 스카프를 만들고 1956년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가 임신한 배를 가리기 위해 든 핸드백 ‘프티 삭 오트’가 유명세가 되면서 의도치 않은 마케팅효과를 얻었고, 켈리에게 허락 받은 뒤 켈리 백이라 칭하게 됩니다.


(왼)제인 버킨 (오)켈리백
출처:(왼)qluiner (오)luiner 티스토리

하지만,뛰어난 명성과 성장 중에 인조신소재가 인기를 얻게 되면서 1970년 침체 됬는데 1978년 로베르가 사망하고 그 의 아들 장 루이 뒤마가 경영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 합니다. 당시 중년층에게 인기 있던 에르메스는 소비자 층을 확대 했고, 우연히 비행기에서 만난 여배우 제인 버킨이 에르메스백의 수납 불만이 시발점으로 그녀가 디자인한 제품이 버킨 백이 탄생하기도 합니다.


(왼)버킨백 (오)빅토리아 베컴
출처:fpasshion.blogspot

버킨 백은 기계로 만들어 지는 가방이 아닌 장인의 손으로 제작하는데 그 과정일 이렇습니다. 3년간 가죽 장인 학교를 다니고 2년간의 수련. 악어 가죽은 오직 최상품. 18시간 동안 만드는 가방으로 일주일에 2개 밖에 생산을 못합니다. 이렇게 생산된 가방은 고객 수선 요구시 그 당시에 썼던 가죽을 그대로 사용해 수선을 할만큼 꼼꼼하고 세심한 작업을 합니다. 버킨 백의 가격이 몇천 만원까지 올라간 이유죠. 힘들게 탄생하는 가방인 만큼 그 수량이 많지 않아 고객들은 대기 명단에 올려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버킨백 소유주는 빅토리아 베컴! 버킨 백의 탄생 이후 1987년 에르메스는 150주년을 맞이했고, 1990년대 세계적으로 명품 산업.


(왼)장 폴 고티에 (오)크리스토프 르메르
출처:(왼)imagnet (오)럭셔리

2003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장 폴 고티에, 2011년 S/S 컬렉션 이후 라코스테 디자이너 크리스토프 르메르가 그 뒤를 이었고, 경영문제에는 LVMH가 손길을 뻗었지만 여전히 가족경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참조: 패션의 탄생.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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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에도 등급표가 있다.
에너지 등급표가 있듯이 옷브랜드에도 등급이 있다는걸 아시나요? 그것도 같은 브랜드내에서 말이죠. 같은 브랜드라도 라벨 색에 따라 다른 등급을 매긴 이유는 브랜드 이미지 업그레이드 전략이라고 합니다.

그 중 몇가지 브랜드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우선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최고급 맞춤 복엔 골드 라벨 기성복엔 레드라벨이 있습니다.

(왼)골드라벨 (오)레드라벨
출처: Google Image

독일 남성 휴고 보스에는 블랙라벨 - 고급 정장. 오렌지라벨- 캐주얼. 그린라벨-골프 등 스포츠 웨어로 나뉩니다.

(왼)블랙라벨 (중) 오렌지라벨 (오)그린라벨
출처: Google Image

등급에 따라 이름을 바꾸는 브랜드.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있습니다. 최고급 핸드메이드 맞춤 라인은 '아르마니 프리베로' 고급의류, 주얼리가 포함되며 그다음 최고급 명품 정장브랜드라고 알려진 블랙 라벨 '조르지오 아르마니'

비교적 캐주얼하고 편안한 아이템 구성된 화이트 라벨 '아르마니 콜레지오니'와 '엠포리오 아르마니' '아르마니 익스체인지' '아르마니 진' 등이 있습니다.
아르마니 프리베는 한국에선 볼 수 없고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백화점에는 입점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나 신세계백화점에 세계 최초로 오픈했습니다.
참조: 에디터 T의 스타일 사전, 네이버,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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